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 [[파일:external/i57.fastpic.ru/ca1d2d9d3ae6d16d60a2241198183bff.jpg]]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이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요안니스 8세가 사망했고, 1449년에 동생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역사|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자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반드시 정복해야 한다고 결정짓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2개월간의 전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와 [[제노바 공화국|제노바]] 등 서유럽 출신의 선원과 상인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실상 서유럽 국가들의 자유항 상태가 되어 있었으며, 대표적인 상업국가였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선원이나 상인들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도 거주할 정도로 '제 2의 고향'에 가까웠다. 참고로, 황제의 요청을 받고 성벽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까지 게양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방전에 임했던 베네치아 거류국과는 달리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는 끝까지 공식적으론 중립을 표명했다.][* 이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베네치아인들은 튀르크 복장을 하고 오스만의 포위를 뚫고 정찰갔던 베네치아인들이 구원 함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그곳이 생지든 사지든, 그곳에 그리스인이 있든 튀르크인이 있든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라고 '''다수결'''을 통해 결정하고 회항했을 정도로 도시와 함께 뼈를 묻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 일부 기사들과 용병[* 여기에는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용병대도 포함된다. 로마 가톨릭과의 통합 조건이 서유럽의 지원이었던 만큼, 통합의 주체였던 로마 교황청은 나름대로 지원을 보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초라한 나머지 병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최후까지 성을 지켰다. 그래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허명은 아니었는지 제법 잘 버텨갔지만 어이없게도 오스만군의 마지막 총공세 때, 성 안팎을 오고가며 유격전을 펼치던 동로마군이 피곤에 지쳐 문을 걸어 잠그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오스만군은 '''15만'''인데 반해, 동로마군은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남자의 수가 7천'''. 결국 오스만군이 '''인민 웨이브'''를 펼치자 휴식시간 없이 서너 시간을 연속으로 싸워야 했고, 결국 컨트롤 미스가 나온 것. 물론 쪽문 이야기는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 방위군 대장을 맡고 있던 제노바 출신의 용병대장인 주스티니아니가 부상으로 갑작스럽게 전열을 이탈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 주스티니아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게다가 결국은 인해전술로 정면을 뚫었다. 이 공세가 마지막이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7&contents_id=7511|#]]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난전 중에 전사했으며[*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 1923~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 다만 동로마인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오스만 측과 서유럽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만 확인했다고. 이는 종교 문제 등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동로마를 까는 김에 황제까지 까자!' 는 심보였다는 것], 이후 사흘 간의 약탈로 제국이 쌓아올렸던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다.[* 그러나 하기아 소피아 성당 같은 유명 건축물의 상당수는 메흐메트 2세의 명령에 의해 보존되었고, 서적류 문화재는 고위 공직자들이 베네치아 공화국 등 서유럽으로 망명하면서 가져갔기에 일부는 보존되었다. 애당초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의 새로운 수도로 낙점되어 있던 터라 공공건물 등은 최대한 파괴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별개로 시민들은 메흐메트가 뒤늦게 멈추기 전까지 약탈, 강간, 학살을 당해야 했고 이 와중에 많은 유물들이 소실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 역시 완전 멀쩡하진 않았고 원래 성당에 있던 성화들이 죄다 회칠이 발라져 버렸다.], 그렇게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이로써 기원전부터 2,206년을 이어온 한때는 위대했던 왕국, 공화국, 제국이었던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